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어니스트 킹 (문단 편집) == 기타 == * 미군 역사상 최대의 권력을 가졌던 군인이었다. 아주 작은 규모의 군대라면 몰라도 [[문민통제]]가 확실하게 자리잡은 민주국가의 군대에서 [[군정권]]과 [[군령권]]을 한 사람이 겸임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평시에도 그런데 하물며 저때는 전시인 데다 당시 미 해군은 전시 군대 규모의 팽창으로 병력만 해도 최대 400만 명이 넘게 증가한다. 일선 전역 사령관이던 [[더글러스 맥아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같은 인물들은 물론이고 같은 합참의 구성원이자 [[육군참모총장]]이던 [[조지 C. 마셜]]이나 [[공군참모총장]]이던 [[헨리 아놀드]],[* 당시는 육군항공대사령관. 그러나 이때 이미 육군 항공대는 거의 육군과는 별도로 굴러가고 있었다.] 심지어 선배 제독이자 [[합동참모의장]]이던[* 당시 명칭은 육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 [[윌리엄 리히]]조차도 킹만큼의 권력은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킹은 성격까지 격렬해서 마셜이나 아놀드와는 수시로 충돌했고, 수하 제독이던 [[체스터 니미츠]]나 [[윌리엄 홀시]] 같은 고위 장성들도 킹의 눈치를 봐야 했을 정도였다. 미국이 군사독재 국가라도 되지 않는 한 저 정도 권력을 가진 군인이 다시 나올 가능성은 없을 듯하다. 항목 작성은 전선 사령관이던 [[체스터 니미츠]]나 그 휘하 함대 사령관들이던 [[윌리엄 홀시]],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같은 수하 제독들보다도 늦었지만 실제로는 미 해군의 [[최종보스]]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닌 인물이었다.[* 사실 이 현상은 타군도 비슷한데, 육군의 [[조지 C. 마셜]]도 수하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더글러스 맥아더]], [[오마 브래들리]], [[조지 패튼]] 등의 존재감에 묻혔고, 공군(당시 육군항공대)의 [[헨리 아놀드]]도 수하인 [[커티스 르메이]]에 비하면 인지도가 미미하다. 마셜, 킹, 아놀드 위에 있던 합참의장 [[윌리엄 리히]]쯤 되면 전쟁사 계열에 갓 입문한 밀덕들은 아예 그 존재도 모를 정도.] * 위에서 나왔듯이 그는 일본을 매우 싫어했는데, 그가 탄 함선인 신시내티가 일본에 입항했을 때 가마쿠라 대불을 보기 위해 가마쿠라로 가다가 소매치기를 당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역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표를 후불로 사려고 했으나 역무원은 그에게 굉장히 불친절하게 대했고, 그날 이후로 그는 일본에 상당히 나쁜 인상을 품게 되었다. 그가 일본 본토 공격에 찬성하자 니미츠 제독은 '''"40년 전에 잃어버린 지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셨나 보군."'''이라고 생각했다고. 물론 킹 제독은 이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예견한 만큼 그저 감정만 가지고 일본 본토 공격을 찬성할 사람은 아니다. * 비록 건방진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남들의 능력까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을 평가하길 "난 미 해군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스프루언스만 빼고.'''"라는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 또한 대서양의 대 독일 잠수함 전략을 두고 영국 해군의 서부 해역 사령관 해군대장 맥스 K. 호턴 제독과 갈등하였지만, 자신보다 더 뛰어난 대 잠수함 전문가임을 인정하고 그의 전략을 수용했다고 한다. 호턴 경은 1942년 11월 중엽부터 영국의 대잠 부대를 맡아 근해 접근로 방위, 원양 초계, 호송선단 작전 등을 총괄했다. 이에 대해 독일 해군 총사령관 해군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은 "호턴 제독의 지휘 하에 영국 대잠 부대는 재료나 기술적인 면은 물론 전술과 정신적인 분야에서도 대단한 향상을 이루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독일 [[U보트]] 부대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라고 평가하였다. 영국의 유명한 해전사가인 스테판 W. 로스킬 대령 또한 "과감한 결단력과 풍부한 식견으로, 호턴 경은 의심할 바 없이 되니츠 제독의 온당한 경쟁자가 되었다." 라는 평가를 남겼다. * 깐깐한 성격만큼이나 꼼꼼하고 상식적인 사람이기도 해서 비효율적인 무기들의 개선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어뢰 스캔들|어뢰에 문제]]가 있다며 함장들과 개발진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그는 함장들의 손을 들어 주었고, 분석 결과 개발진들이 어뢰값 아깝다고 폭약 대신 물을 채워 실험을 했던 것이 밝혀졌다.[* 어뢰용 [[폭약]]인 Torpex의 밀도는 물의 1.6배이므로, 물 대신 폭약을 넣으면 어뢰가 실험 당시보다 무거워져서 발사시 예상 궤적보다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다. 실제로 불발이라고 생각되었던 어뢰의 상당수는 불발이 아니라 적 함선의 밑으로 쏙 빠져서(...) 어이없이 빗나간 것이었다.] 또한 한때 미국에서 '[[박쥐]] 폭탄' 같은 걸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 소이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병기로 계획 자체가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원자탄도 완성된 마당에 그런 걸 더이상 연구할 필요가 없다 여겼고 이 소식이 그의 귀에 들어가자 킹 제독은 즉시 그 계획을 중단시켰다. *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킹(철권)|킹]]으로 패러디하였다. 만화 특성상 태평양 방면의 다른 제독들처럼 비중이 매우 낮다. 고추병신의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kancolle&no=1569127&page|플레처급 구축함 포터 만화]]에서도 킹으로 패러디되었다. 킹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 중에서는 저 킹이 제일 유명하다보니 저 외에도 국내 창작물에서 재규어 두건을 쓴 모습이 은근히 자주 보인다. * 항공모함 [[렉싱턴급 항공모함|렉싱턴]]의 함장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었기에 렉싱턴 함을 매우 아꼈고,[* 사실 이건 킹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렉싱턴 자체가 미해군 최초의 본격적인 항모라는 역사적 가치가 큰 함정이었는데다가, 순양전함으로 건조 중이던 함체를 개조한 배이다보니 세장비가 큰 길쭉하고 아름다운 외형을 지녀 미해군 내 많은 렉싱턴빠들을 양산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1942년에 있었던 [[산호해 해전]]을 지휘한 [[프랭크 플레처]]가 렉싱턴 함을 잃고 말자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플레처 제독이 뛰어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직만 전전하며 만년 중장에 머무르게 된 것도 이 때 킹의 눈 밖에 난 때문이라는 썰도 있다. 물론 해당 항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이는 플레처 제독의 전장에서의 불운과, 항공모함의 전략적 가치가 급등하면서 항공 병과 출신 장교들의 입지가 초월적으로 높아진 전시 상황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킹이 아무리 성격이 개차반이기로서니 개인적 감정만으로 인재를 썩힐 사람은 아니었다.[* 스프루언스도 순양함 라인의 수상함 출신이지만 플레처 제독과 달리 부상으로 물러나는 일 없이 꾸준히 일선에 머무르면서 전공을 쌓았다. 플레처 제독의 경우는 부상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회복하고 왔더니 일선에 자리가 없는 경우였다.] * 킹 제독은 전쟁 중 기존의 [[CPO]] 이상 해군 장병들의 근무복 겸 하약정복인 카키색 군복을 검은색 부착물이 들어간 청회색 군복으로 바꾸어 피복비를 절감하려고 했다. 해군 내에서는 [[적십자]] 직원 제복이냐며 인기가 없었고, 이들의 의사를 반영해 니미츠 제독은 기존의 카키 정복이 보다 해군스럽고 열대 환경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킹 제독은 회색 정복을 입고 카키 정복을 입은 니미츠 제독과 함께 기자들 앞에 나왔는데, 한 사진사가 킹 제독에게, "'''이봐 [[상사(계급)|상사]]'''. 니미츠 제독의 사진을 찍어야 하니 옆으로 비켜 서게."라고 말해 킹 제독을 삐치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비가 오는 중이라 두 제독 모두 정복 위에 레인코트를 걸쳤는데, 여기엔 계급장을 달지 않게 되어 있어 정모 챙에 새겨진 잎사귀 자수와 모표, 턱끈 재질만으로 신분(CPO/준사관 및 위관/영관/장관급 장교)만 확인할 수 있었고, 회색 정모는 단가 절감한답시고 챙의 자수를 생략하고 턱끈을 CPO용 검정색을 달았기 때문에 이를 보고 사진사가 착각했던 것이다. 이 굴욕 이후 킹 스스로도 회색 정복을 점점 멀리했고, 1948년부터는 회색 정복이 아예 폐지됐다. * [[윈스턴 처칠]]과의 사이도 썩 좋지 않았는데,[* 킹 제독은 영국이 미국에 의존하는 경향을 꺼려 했다.] 태평양 전선이 한참 격화되어 대서양 함대 대부분을 태평양으로 차출하자 [[유보트]]에 의한 피해가 극심해졌고,[* 이 때문에 미국도 개전 초 독일 유보트가 [[뉴욕]]을 기습하는 꼴을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어야 했고 유보트의 실적도 이때 순간적으로 뛰어올랐다.] 이에 처칠은 "킹이 영국을 말아먹는다!"며 킹 제독을 비난했다.[* 하지만 둘 다 굉장히 긴박한 상황이긴 했다. 영국은 대서양의 유보트를 처리하지 않으면 국가가 말라죽을 상황이었고, 미국은 과달카날이 함락당하면 태평양의 제해권을 잃고 미국 서부로 통하는 고속항로가 뚫릴 판이었다.] 그리고 2년 후 전황이 나아지자 처칠이 자존심을 회복하고 [[인도양]]에서 [[말레이 해전|희대의]] [[실론 해전|굴욕]]을 선사한 일본에게 복수할 겸 인도양 함대를 태평양에 투입하려고 했지만 킹 제독은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으려 하는 영국의 선택을 매우 반대했다. 사실 그 때문만도 아니고 당시 영국이 파견할 함대의 보급능력이 상당히 의심스러운 수준이기도 했으며 니미츠 제독도 그것을 우려하여 영국측에 캐묻기도 했다. 그러나 처칠은 직접 루즈벨트에게 직접 함대 파견제안의 수용을 다짐받았고 영국 해군 태평양 함대가 신설되어 전개됐는데 그후에도 니미츠 제독이 영국 함대를 오키나와 전투에 기동부대로 참전시킨 것은 영국측이 보급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로 다짐한 뒤였다.[* 사실 영국 태평양 함대의 참전을 숟가락 얹기로만 이해하는 것은 다소 피상적인 결론이다.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서 발생할 카미카제 공격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미 해군의 중대한 과제였고, 니미츠 제독은 이를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썼다. 본래 합참의 직할로 일본 본토 폭격을 전담했던 르메이의 제21폭격기 사령부도 제독의 요청으로 전용되었던 마당에 영국 태평양 함대의 등장은 가뭄속의 단비와 마찬가지였다. 다만 초기에 니미츠는 영국측 동격자였던 프레이저 제독(영국 해군 대장)과의 면담에서 영국 함대를 맥아더 휘하의 제7함대로 전속시키려고 했으나 정치적 후폭풍이 발생할 결과라 반려하고 대신 용도를 변경했다.] 그리고 사실 영국의 참여 요청을 탐탁치 않아 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국은 부족한 항공모함의 수로 인해 영국 동양함대에 항모 1척을 지원해주길 요청했는데 말레이 해전 등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영국은 인도까지 잃게 될까 두려워 딱 잘라 거절했다. 어려울 때는 매정하게 지원을 거절해놓고 이후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한 격이니 킹 제독 입장에서는 당연히 좋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국 입장에서 약간 변명을 하자면 당시 영국은 일본이 인도양 쪽으로 추가적인 공격을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는데다가 [[실론 해전]]에서 패하면서 인도양 동부의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인도를 상실하는것은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산타 크루즈 해전 이후 급한 상황에서는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빅토리어스]]를 빌려주기는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킹 입장에서는 좋게 보기 힘든 것도 사실.] * 의외로 군사적인 면에서 실수를 한 일이 있다. 영국은 미국에게 유보트에 대항하기 위해서 호송선단을 조직하고 호위함을 붙이는 방법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으나 꿋꿋하게 이를 거부하여 유보트들이 미국 동부 해안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킹은 유조선들이 대서양을 항해하는것을 중지시키고 유조선들을 항구로 밀어넣어버린다.[* 덕분에 되니츠가 갑자기 격침시킬 배가 사라졌다고 당황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다만 이건 변명의 여지가 있는게 당시 미 해군에서 대잠임무에 투입할 군함의 숫자가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이때 영국이 없는 살림에도 쓸만한 대잠어선을 빌려줬다.[* 당연히 영국이 선심 쓰듯 빌려준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건너가는 물자가 없으면 영국은 정말로 나라가 파탄날 위기에 처해있었다. 물론 미국도 영국의 항복만큼은 막아야 했기 때문에 물자 수송은 전쟁 중 계속되었다.] 참고로 영국은 전쟁 초반에 미국한테 구형 구축함을 50척 이상 얻어갔는데 나중에 미국이 급해지니 빌려주는게 어선. 물론 구축함을 얻는 대가로 카리브 해의 군항들을 넘겨줬으니 공짜로 받아간건 아니지만. * 킹이 사망한 뒤 2차대전에서 같이 활동했던 어느 영국 제독이 킹의 딸에게 "아버님은 왜 항상 영국에 대해 그렇게 화를 내셨습니까?" 하고 묻자 킹의 딸이 "아버지는 [[미국]]과 [[미 해군]]을 제외한 모든 것에 화를 내셨어요."라고 대답했다.[* 여담으로 필립 비안 영국 해군 원수 역시 킹에 대해 비슷한 언급을 남겼다. 여기서는 한 술 더 떠서 [[미 육군]]을 포함해 [[미 해군]]을 제외한 모든 것을 싫어하고 의심했다고...] * [[커티스 르메이]]마저 능가하는 무뚝뚝한 성격의 소유자로, 미 해군의 전황에 대한 언론의 취재에 승패만 알려주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 자주 의견이 충돌했던 조지 C. 마셜과 달리, 태평양 전쟁 승전 후에는 해군 기록과 자서전 등의 저술 활동 외에는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는 킹이 전쟁이 끝나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점도 있었지만, 킹의 성격이 워낙에 정치에 부적합했던 이유도 크다. [[해리 S 트루먼]]은 킹의 성격을 껄끄러워 했고, 킹과 포레스털 해군 장관의 사이도 좋지 못했다. * 킹을 밀어줬던 루즈벨트조차 '매일 아침 토치버너로 면도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남겼다. * 미합중국 해군은 킹이 사망할 때 즈음해서 킹처럼 까다로운 성격과 뛰어난 능력을 동시에 갖춘 제독 덕분에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제독이 바로 [[하이먼 리코버]]다. 성질과 역량뿐만 아니라, 매우 긴 시간을 미 해군에서 복무한 것과 밀어주던 대통령의 후임 대통령이 껄끄러워 했던 것까지 비슷하다. * 직함이 Chief of Naval Operations(CNO)이고, 조직도 상 해군장관의 관할 하에 있다는 점 때문인지 다소 오래된 번역서에서는 저 명칭을 직역한 '''해군작전부장'''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지금도 미 해군참모총장의 영문 명칭은 CNO이고, 지금도 중국과 일본에서는 해군작전부장이라고 번역한다.] 부장이라니 없어보이지만 [[참모총장]]이라 작전권이 없었던 육군참모총장과는 달리, 실제로 작전권을 가진 직책이었으니 틀린 번역이라고 할 수도 없다.[* 물론 현재의 CNO도 참모총장처럼 작전권은 없으나 직책명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 최악의 성격이라 혹평받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성 자체가 없지는 않았다. 전쟁중 진주만 공습으로 경질된 [[허즈번드 킴멜]]의 장남이자 해군 잠수함 함장으로 종군 중이던 매닝 킴멜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보고받고, 역시 해군 잠수함 장교로 종군 중이던 킴멜의 차남 토마스 킴멜[* 허즈번드 킴멜에게는 아들이 총 3명이 있지만, 이 중 막내인 매닝 킴멜 3세는 2차 대전이 끝난 뒤에 태어났으므로 당시에는 토마스가 유일한 자식인 셈이었다.]을 자신의 직권으로 후방 지상근무로 배치시켰다. 정확하게 말하면 직장에서만 까다로운 상사로, 나름대로 [[파티]]도 즐겼고, 다른 제독들의 부인들에게는 친절했다. * 가족으로는 마사 에거튼과 결혼하여 1남 6녀를 두었으며, 아들 어니스트 킹 주니어도 미합중국 해군으로 복무하였다. * [[https://en.wikipedia.org/wiki/Ernest_King#Personal_life| 타 자료를 인용한 영문위키에 따르면]] 킹은 아내와 더불어 성공회 교도였으며, 자식들도 성공회 방식으로 교육하였다. 그렇지만 가족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취미로 술, 도박을 즐겼으며, 바람둥이(womanizer) 기질이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미군 원수]][[분류:1878년 출생]][[분류:1956년 사망]][[분류:로레인 카운티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